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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과 페르시아의 만남, 마우솔로스 영묘의 예술적 가치

카리아 왕국의 왕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마우솔로스를 위해 세워진 거대한 영묘, 고대 건축의 정점



조각과 건축의 만남 그

김학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9/25 [07:27]

헬레니즘과 페르시아의 만남, 마우솔로스 영묘의 예술적 가치

카리아 왕국의 왕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마우솔로스를 위해 세워진 거대한 영묘, 고대 건축의 정점



조각과 건축의 만남 그
김학영 기자 | 입력 : 2024/09/25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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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솔로스 영묘의 내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영묘의 외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내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당시의 건축 양식과 장례 의식을 고려할 때, 내부는 화려한 장식물과 조각들로 꾸며졌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학자들은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유골이 영묘 내부의 지하실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곳에 보물이나 유물이 함께 묻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여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사진=유투브 기묘한 밤 캡쳐)    

 

마우솔로스 영묘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묘지로 손꼽혔다. 이 거대한 영묘는 카리아 왕국의 왕이었던 마우솔로스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으며,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명이 혼합된 독특한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영묘의 크기와 아름다움은 그리스 건축의 정점을 보여주는 상징적 건축물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마우솔로스는 기원전 4세기경 소아시아에 위치한 카리아 왕국을 다스린 왕으로,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있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마우솔로스는 카리아의 수도를 할리카르나소스로 옮기고, 이 도시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건축 사업을 진행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거대한 영묘였다. 마우솔로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이자 여동생인 아르테미시아 2세가 영묘의 건축을 주도하였고, 이를 통해 마우솔로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다.

 

마우솔로스 영묘는 길이 약 38미터, 폭 33미터, 높이 43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영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외벽은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특히 건축가 사티로스와 피티우스가 설계한 이 영묘는 헬레니즘 양식과 동양적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양식을 띠고 있었다. 영묘의 기둥은 그리스 신전에서 볼 수 있는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이 혼합되어 사용되었으며, 그 사이에는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동상이 놓여 있었다. 이 동상은 그들의 권위와 왕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중요한 조각품으로, 영묘의 상단부에는 그들을 태운 전차가 놓여 있었고, 이는 영묘의 전체적인 구조와 조화를 이루었다.

 

영묘의 외벽에는 그리스 신화 속 전투 장면과 마우솔로스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 조각들은 당시 최고의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영묘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특히 조각가 스코파스와 브리악시스, 레오카레스와 티모테우스가 참여한 이 조각 작업은 고대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영묘의 벽면을 장식한 이 조각들은 마우솔로스의 통치와 카리아 왕국의 영광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웅장한 영묘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차례 자연재해와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기원후 12세기와 14세기 사이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영묘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결국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15세기 초, 할리카르나소스를 점령한 성 요한 기사단은 영묘의 남은 석재를 이용해 성벽을 보강하는 데 사용했고, 그로 인해 영묘는 더욱 황폐해졌다. 오늘날 마우솔로스 영묘의 잔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그 웅장했던 모습은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마우솔로스 영묘의 내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영묘의 외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내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당시의 건축 양식과 장례 의식을 고려할 때, 내부는 화려한 장식물과 조각들로 꾸며졌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학자들은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유골이 영묘 내부의 지하실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곳에 보물이나 유물이 함께 묻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여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고고학자 찰스 뉴턴은 마우솔로스 영묘를 발굴하기 위한 탐사를 시작했다. 그는 할리카르나소스의 유적에서 일부 대리석 조각과 전차 조각상을 발견했으며, 이를 통해 영묘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발굴된 유물들은 영묘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전체적인 구조를 완벽히 복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 이 발굴된 유물들은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마우솔로스 영묘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마우솔로스 영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자, 고대 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상징이었다. 이 영묘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마우솔로스 왕과 그의 왕국을 기리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로서, 당시 그리스와 동양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상징적 유적이었다. 영묘의 조각들은 헬레니즘 예술의 절정을 보여주었으며, 그 건축 양식은 이후 많은 건축물에 영감을 주었다.

 

비록 마우솔로스 영묘는 여러 차례의 지진과 약탈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영묘의 이름에서 유래한 '마우솔레움'이라는 단어는 오늘날까지도 거대한 묘지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마우솔로스 영묘는 고대 건축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남아 있다.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건축물은 그 웅장함과 미스터리로 인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구되고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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